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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일상을 깨우는 여행
별 헤는 밤을 추억하다
의령의 밤이 당신의 낮보다 아름다운 이유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어른이 된다는 건, 은하수에 쪽배가 떠다니지 않고 달에 토끼가 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는 일이다. 그건 조금 슬픈 일이다. 하지만 도리가 없다. 아이가 어른이 되었으니까. 그래도 가끔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새해를 시작하는 1월, 남쪽 작은 동네 의령을 떠올린 건 순전히 이 ‘별’ 때문이다.
글, 사진. 정철훈(여행작가), 사진제공. 의령군청

한우산에서 만난 별들의 추억

별을 보러 여행을 간다. 어릴 적, 저녁 먹고 평상에 누워 바라보던 별을 보기 위해 시간을 내고 돈을 들여 여행을 간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동안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골목과 도로에 가로등이 촘촘히 들어섰고, 상점의 간판들은 밤새 불을 밝힌다. 밤이 낮처럼 밝아진 세상. 그렇게 밤하늘의 별은 우리 곁에서 하나둘씩 지워져버렸다. ‘나 때는’으로 시작하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나 때는 정말, 별 보러 여행 갈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의령에서 ‘별멍’ 명당은 한우산이다. 마블링 촘촘한 한우(韓牛)가 아니다. 찰 한(寒)에 비 우(雨)를 쓴다. 그러니까 찬비가 내리는 산, 찰비산이다. 한우산 들머리인 벽계리 계곡을 지금도 찰비계곡이라 부르는 이유다. 개인적으로 한우산보다 찰비산이 훨씬 정겨운데, 왜 뜻도 잘 통하지 않는 한자 이름을 고집하는지 모르겠다.
한우산은 해발 800m가 넘는 제법 높은 산이다. 별을 보려고 고속도로를 4시간 이상 달려온 것도 모자라 등산까지? 아니다. 한우산은 산정 턱밑까지 차로 갈 수 있다. 길은 두 방향에서 한우산과 연결된다. 앞서 언급한 벽계리 쪽 임도와 쇠목재를 넘는 1013번 지방도. 쇠목재 방향은 현재 터널공사로 차량 통행을 제한해 현재로선 벽계리 임도가 한우산에 오르는 유일한 길인데, 굽이굽이 8km 남짓 이어진 임도는 내내 오르막인데다 길이 좁아 운전에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한우산 정상, 해발 800m

한우산에서 별 보기 좋은 장소는 한우정과 도깨비숲 그리고 산정이다. 한우정과 한우산 정상은 300m쯤 떨어져 있다. 오가는데 20분 정도 걸린다. 봄이면 철쭉이 무리지어 피는 도깨숲은 한우정 바로 아래서 시작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별멍 명소이다 보니 한우산 주변엔 그 흔한 가로등 하나 없다. 그러니, 기왕 나선 길이면 조금 서두르는 게 여러모로 유리하다. 어두워지기 전에 도깨비숲을 걷고, 산정 억새평원에서 해넘이까지 감상한다면 별을 보러 떠 나온 여행길이 한층 더 풍성해질 테니.

한우산 도깨비숲(의령군 제공)

쇠목재 도깨비 설화를 바탕으로 꾸민 도깨비숲은 한우도령과 응봉낭자 그리고 도깨비 쇠목이에 얽힌 이야기를 다양한 조형물로 소개한 공간이다. 산책로 전체에 깔끔한 나무 덱이 설치돼 누구나 편하게 걸을 수 있다. 익살맞은 도깨비 조형물은 포토 존으로 손색이 없다.
이젠, 별을 만날 시간이다. 어디에 자리를 잡을 지는 각 자의 선택이다. 한우산 정수리에 올라 바라보는 별도 아름답고, 한우정에서 보는 별도 멋지다. 아니 각기 다 른 매력이 있다. 별에 집중하고 싶다면 한우정이, 의령 야경과 어우러진 별을 보고 싶다면 산정이 낫다. 한적한 산꼭대기에 오르면별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빛 공해가 적은 의령이지만 가로 등과 상점 간판은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밤새 불을 밝히니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내가 우주에 살고 있다는 걸 실감하기에. 10여 년 전, 중국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별을 본 그날처럼. 그날 나는 일행들과 모래바닥에 누워 밤새 술을 마시며 원 없이 별을 봤다. 그러다 누군가 “우린 지금 사막이 아니라 우주 한복판에 누워있는 거야”라고 말했을 때,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우주라니. 그런데 사실이었다. 내 시선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곳에서 돋은 별들이 머리 위를 스치듯 지나 반대편까지 빼곡히 들어차 있었으니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별들이 하늘과 땅, 지구와 우주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렸으니까. 그때의 감동이 지금 여기, 의령에서 다시 스멀스멀 깨어나는 듯 하다. 솔직히, 망망대해 같은 모래사막에서 느낀 감동과 지금의 감동이 같을 순 없지만, 한껏 목을 젖히고 바라본 하늘엔 그날,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본 것과 같은 별들이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지 않은가. 북극성도,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도. 그날 밤처럼 순식간에 꼬리를 감춘 유성도 몇 갠가 지나간 듯하고. 청정지역으로 알려진 한우산 일대에선 6~7월이면 유영하듯 밤하늘을 떠다니는 반딧불이도 볼 수 있다는데, 반딧불이와 어우러진 한우산 밤풍경이 문뜩 궁금하다. 어쩌면 그 밤하늘이 궁금해 이 겨울이 가고 여름 이 시작될 즈음, 다시 이곳을 찾을지도 모르겠다.

한우산
  • 경남 의령군 대의면 신전리

의령에서 만나는 또 다른 즐거움들

밤이 아름다운 의령이지만, 낮 시간을 이용해 돌아볼 곳도 많다. 일붕사도 그런 곳 중 하나다. 일붕사는 ‘왕오천축국전’을 쓴 신라의 고승 혜초가 창건한 성덕암이 그 전신이다. 거듭된 화재로 소실된 암자를 대신해 동굴법당을 만들게 되었다는데, 경내에 있는 두 곳의 동불 법당 중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은 〈기네스북〉에도 등재된 동양 최대 규모의 동굴 법당이다. 일붕사가 기댄 봉황대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 태종무열왕의 첫 요새가 있던 자리로, 1300여 년 전 나당 연합군과 백제군이 격렬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봉황대 중턱에 자리한 정자에서는 일붕사가 자리한 평촌리 일대가 한눈에 담긴다. 봉황대는 의령 9경 가운데 하나다.
의령은 별의 고장이자, 의병의 고장이다. 의령을 ‘의병의 고장’이라 부르는 건 곽재우 장군때문 이다. 임진왜란 당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장군은 전장에서 늘 백마를 타고 붉은 도 포를 입어 ‘홍의장군’이라 불렸다. 임진왜란 초기 곽재우 장군은 의병 50여 명으로 정암진에서 왜군을 맞아 대승을 거뒀다. 정암진 전투에서 사살된 왜군은 무려 2000여 명. 경상도와 충청도를 점령한 왜군의 전라도 진출은 정암진 전투의 패배로 좌절됐다.

일붕사 동굴법당
곽재우장군

곽재우 장군은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서 태어났다. 낙동강에서 갈라진 유곡천이 앞에 흐르고, 고망산이 뒤를 받친 아늑한 곳이다. 2005년 복원한 곽재우 장군 생가는 조선 중기 남부 지방 사 대부의 전형적인 가옥 구조를 하고 있는데, 솟을대문을 지나면 정면에 사랑채가 있고, 문간채와 나란한 담 너머 안채와 곳간채가 자리한다. 안채 옆으로 정갈한 장독대와 우물도 있다. 낮은 담을 사이에 두고 안채와 마주한 건물은 처녀나 새댁이 사용하던 별당이다. 의령 의병의 역사를 조금 더 깊이 알고 싶다면 의령박물관을 찾으면 된다. 이곳에는 장검과 칼집, 말안장 등 곽재우 장군 유물(보물) 외에도 그의 휘하에서 활약한 윤탁, 오운, 이운장, 강언룡, 인기종 등 17장군 관련 유물을 만날 수 있다. 의병박물관 옆 충익사는 곽재우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곽재우 장군 생가
의령박물관

밤새 별 구경하느라 출출해진 배는 의령 대표 먹을거리인 소바와 망개떡이 책임진다. 의병박 물관에서 차로 3분 거리에 있는 의령전통시장에 소바와 망개떡 파는 식당과 상점이 모여있다. 소바(そば)는 우리말로 ‘메밀’ 또는 ‘메밀국수’라는 뜻이니 ‘의령 소바’는 결국 ‘의령 메밀국수’인 셈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일본식 소바는 물론 강원도 막국수와도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길게 찢은 소고기 장조림이 고명으로 올라간다는 점. 의령 소바는 온면과 냉면, 비빔면 등 세 가지 맛으로 즐긴다. 의령을 대표하는 전통음식에서 망개떡을 빼놓으면 섭섭하다. 망개떡은 멥쌀로 만든 반죽을 망개나무 잎으로 싸서 찐 떡이다. 망개나무 잎에 떡을 싸서 찌면 떡이 서로 달라붙지 않고,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다. 망개나무 잎에서 배어난 향은 덤. 사실 망개떡을 싼 잎은 망개나무가 아니라 청미래나무 잎이다. 오래전부터 경상도에서 청미래나무를 망개나무라 불렀기에 지금까지 망개떡이라 부른다고. 떡 속에 넉넉히 들어가는 부드러운 팥소는 망개떡 맛을 완성하는 화룡점정이다.

의령망개떡
의령소바
일붕사, 일붕사 봉황대
일붕사
  • 경남 의령군 궁류면 청정로 1202-15
의령박물관
  • 경남 의령군 의령읍 충익로,1-25
  • 매주 월 휴무
의령전통시장
  • 경남 의령군 의령읍 서동리 4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