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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 스포츠
‘영구결번’ 전설이 되다
스포츠에는 영구결번이 존재한다.
영구결번은 큰 성과를 거둔 선수를 기리기 위해
그의 등번호를 다른 선수가 사용하지 않도록 지정하는 것을 뜻한다.
선수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선물이자 명예다.
글. 편집실

한 명에게만 허락된 등번호

유니폼에 새겨진 등번호는 경기를 뛰는 선수의 또 다른 이름이다. 등번호는 미국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에서 소속 선수를 구별하기 위해 1929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고, 점차 다른 종목으로 확산되었다. 종목별, 포지션별로 부여하는 번호가 달라서 선수의 포지션이나 경기 스타일 등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특징으로 여겨진다.
영구결번은 처음엔 상업적인 취지에서 생겨났다. 유명 선수가 은퇴했을 때 선수의 기념품, 유니폼 등의 판매 수익이 떨어질 것을 대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후 점차 선수를 공헌하는 명예로운 제도로 발전하였고, 현재 영구결번은 최고의 선수를 상징한다.
프로스포츠 최초 영구결번의 주인공은 미국프로풋볼(NFL) 뉴욕 자이언츠 레이 플래허티 선수다. 그가 은퇴하자 구단은 그가 입었던 1번 유니폼을 더 이상 제작하지 않았다. 최초의 흑인 야구선수 재키 로빈슨은 역사상 유일한 ‘전 구단 영구결번’이라는 명예를 남겼다. 메이저리그는 2004년에 그의 생일인 4월 15일을 ‘재키 로빈스 데이’로 정하였고, 그날이 되면 모든 선수부터 감독, 코치, 심판까지 그의 등번호 42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는다.

모든 종목에서 영구결번이 활성화되진 않았지만, 많은 현역 선수들이 영구결번 선수들을 본보기 삼아 꿈을 키우고 있다. 앞으로도 영구결번 선수들은 계속해서 생겨날 테고, 이들은 또 다른 전설이 되어 프로스포츠를 이끌 것이다.

한국 리그의 영구결번 이야기

1982년 출범한 한국프로야구(KBO)의 영구결번 선수는 총 15명이다. 시작은 1986년 OB(현 두산) 베어스 54번 김영신 선수다. 그는 자신의 부진한 성적을 비관해 스스로 죽음을 택했고 구단은 애도의 뜻으로 영구결번을 지정했다. 김영신 선수 외에는 본래 취지에 맞게 구단에 공헌한 선수들이 지정되었는데, 첫 번째가 선동열 선수다. 1985년 해태 타이거즈에서 데뷔한 그는 367번의 경기에 출전해 146승 40패 132세이브 평균자책점 1.20라는 화려한 성적을 남겼다. 국내를 평정 후 일본으로 진출했고, 구단에서 그의 등번호 18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며 이를 기념했다.
한국프로축구(K-LEAGUE)는 3명의 선수만이 영구결번을 받았다. 최초의 영구결번은 대우 로얄즈의 16번 김주성 선수로, 1989~1991년 3년 연속 아시아 축구 연맹 올해의 선수로 선정될 만큼 경기력이 뛰어났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38번 윤성효 선수, 전북 현대 모터스의 20번 이동국 선수가 영구결번의 영광을 안았다.
한국프로농구(KBL)는 남자농구 11명, 여자농구 4명을 더해 총 15명의 영구결번 선수가 있다. 첫 번째 주인공은 삼성 썬더스 故 김현준 선수다. 1983년 삼성전자에 입단해 농구대잔치 역사상 가장 많은 점수를 올린 스타플레이어다.
1999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구단은 그를 기억하기 위해 등번호 10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이어 남자농구에서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14번 김유택 선수와 여자농구에서 신한은행 에드버스 0번 전주원 선수가 은퇴와 동시에 영구결번 선수가 되었다.
많은 현역 선수가 영구결번 선수들을 본보기 삼아 꿈을 키우고 있다. 앞으로도 영구결번 선수들은 계속해서 생겨날 테고, 이들은 또 다른 전설이 되어 프로스포츠를 이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