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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24h 빙글뱅글
우리는 왜 선뜻 남을 도울까?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행복과 이익을 더욱 추구하는 이타성은 우리 사회를 더욱 끈끈하게 연결한다.
그리고 뇌과학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인간이 이타적 행동을 하는 데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기저에 깔려 있다.
글. 김학진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김학진 교수 고려대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보스턴대에서 석사 학위를, 위스콘신주립대에서 심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에서 박사 후 연구원을 거쳐 현재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fMRI(기능적 자기공명영상 기법)를 사용해 인간의 경제적, 사회적 의사결정과 관련된 뇌 매커니즘을 연구하며, ‘공정성’과 ‘이타적 선택’의 신경학적 기제를 밝히는 연구들을 진행해왔다.

타인을 통해서 자아 인식하기

“당신은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해요.”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 등장하는 이 문장은, 오랫동안 극도의 이기주의자로 살아왔지만 여자주인공을 만난 뒤 타인을 향해 마음을 열게 된 남자주인공이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건넨 감동적인 대사다.
그런데 이 감동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남을 돕는 행위는 불순한 동기가 아닌가?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이타적 행동의 동기로 용납될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어려운 사람을 도왔을 때 느끼는 뿌듯함과 즐거움은 과연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목숨을 던진 시민영웅들의 이타적인 행동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가 SNS ‘좋아요’에 집착하는 이유는 인정 욕구 때문이다. 심리학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뛰어난 통찰력을 가졌던 심리학자로 손꼽히는 윌리엄 제임스는 이미 100년도 훨씬 전에 “인간 본성의 가장 근원적인 원리는 바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라 주장한 바 있다. 인정 욕구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주는 대상(예를 들면 아기일 경우 그 대상은 엄마가 된다)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얻기 위한 노력에서 비롯된다. 육체적, 지적, 감성적, 예술적으로 자신의 우수성을 과시하고 인정받으려는 행동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며 타인을 위한 이타적인 행동이나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태도로 나타나기도 한다.
최근 여러 연구에 따르면 사회화가 이루어지기 훨씬 전인 유아들에게서도 도덕적·이타적 가치를 추구하는 성향이 관찰된다고 한다. 이러한 결과들은 인간이 본격적으로 사회적 가치들을 학습하기 훨씬 전부터 타인의 감정을 구분하고 타인의 호감을 보상으로 환산할 수 있는 가치 계산 기제를 사용하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인정 욕구 혹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호감을 얻으려는 욕구는 인간의 거의 모든 사회적 행동, 그리고 인간이 추구하는 거의 모든 사회적 가치의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다고 봐야 한다. 사실 이러한 욕구야말로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가장 큰 차이가 아닐까 싶다.

공간과 관점 이동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룰때
우리 뇌는
타인과 소통하는 데
최적의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타인과 효율적으로 소통하기 위한 뇌의 선택

2008년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의 마지막 경기를 숨죽여 봤던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한 폭의 그림 같이 경기장을 수놓은 뒤 빙판 위에 우뚝 선 김연아 선수가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을 기억하는가. 김연아 선수가 그동안 느껴온 고민과 설움, 그리고 간절함이 모두 내 것처럼 느껴지는 듯했다. 이 경기를 지켜본 많은 사람이 아마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공감’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심리적 경험을 통해 우리는 어린아이가 잔인하게 성폭행당한 사건 보도를 들을 때 아이의 아빠처럼 함께 분노하는가 하면, 차가운 바닷물에 갇힌 아이들의 소식을 들을 때에는 아이의 엄마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구조 소식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때, 우리는 상대방도 나와 똑같은 감정을 경험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 공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자기중심적인 감정이며, 나의 과거 경험과 현재 신체 상태를 재료로 사용해 재구성한 감정 경험이 실제 타인의 감정과 일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관점 이동 능력’은 공감과는 구분되는 또 다른 종류의 타인 이해 능력으로, 자신의 것과는 다른 타인의 선호, 의도, 신념 등을 파악하는 능력이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투사하여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시도보다는 이전에 상대방이 보였던 행동과 현재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고려하여 다음 행동을 추론해내는 고도의 계산 과정이 필요하다.
공감과 관점 이동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룰 때 우리 뇌는 타인과 소통하는 데 최적의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공감과 관점 이동이 상호보완적 기능을 완수해야 비로소 개인의 공감 반응은 여러 사람의 관점을 취해 더욱 풍부하고 다양해질 수 있다.
‘자기 감정 인식’은 어떤 감정을 경험할 때 이 감정을 유발한 원인을 섬세하고 정확하게 인식함으로써 보다 정교하고 세분화된 감정 반응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자기 감정 인식의 결과로 정교하게 세분화된 풍부한 감정 리스트를 갖게 된 사람은 공감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재료들이 풍부하다. 섬세하고 풍부한 감정 리스트를 재료로 사용하여 타인의 감정을 이해할 때 우리는 직관적이면서도 정확하게 공감할 수 있다.

‘자기중심적’ 기준에서의 이타성

인간의 뇌는 약 1,000억 개의 신경세포들로 구성된다. 하나의 신경세포가 평균 1,000개의 시냅스를 가지고 신경회로망을 이룬다는 점을 고려하면 천문학적 수준의 정보 조합도 가능하다. 이처럼 인간의 뇌는 놀라울 정도로 방대한 정보의 저장과 처리가 가능하지만 거의 무한에 가까운 세상의 정보들 앞에 놓일 때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 우리 뇌는 최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형태로 잘 변형해야 한다. 그래서 뇌는 자연스럽게 세상의 정보들을 덩어리로 묶어서 분류하게 된다. 또한 정보들을 변형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기준’을 정하는 시점에서 우리 뇌는 자연스럽게 ‘자기중심적’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자신을 정확히 인지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타인을 떠나 홀로 존재하는 ‘나’는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최대한 타인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객관적 관점이 필요하다. 타인의 시선과 무관하게 인간의 사회적 판단과 행동을 설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오히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더욱 명확히 인식하고, 타인과의 소통을 늘리며 긍정적인 사회적 규범을 형성할 방법을 모색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뇌과학이 보여주는 도덕성과 이타성이란, 이기적인 나의 어두운 욕구를 억제하는 절대 선이 아니다. 오히려 내 주위를 둘러싼 여러 대상과 환경에 발맞추어가면서 내가 갖고 태어난 내적 욕구를 자연스럽게 표출하고 다듬어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또 다른 형태의 욕구일 수 있다. 도덕성과 이타성은 어쩌면 우리의 내적 욕구가 성장하면서 도달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는 궁극적 지향점이 아닐까? 이 궁극적 지향점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나 자신의 욕구는 결코 무시되거나 배제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다. 그 목표에 도달했을 때 가장 큰 수혜자 또한 내 자신이 될 것이다.